김지섭(金祉燮, 1885년 ~ 1928년 2월 2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호는 추강(秋岡)이며,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입니다.



일본어를 1달 만에 익혀 상주보통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독학으로 금산 지방 법원의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모든 것을 뿌리친 채 오로지 독립운동만을 할 것을 결심,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과 고려공산당에 가입합니다.


천황을 향해 의거하기로 한 이유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을 일본인들이 사냥하고 학살하는 모습에서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그 상황에서 충격을 받고, 목숨 바쳐 의거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의열단에 가입한 후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 내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찰서, 재판소 등을 비롯한 일제 주요관서를 폭파하기 위해 국내로 30여 개나 되는 폭탄의 반입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간신히 빠져나와 다시 상하이로 피신합니다.


이후 의열단에서는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고관들이 대거 참석하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했고, 이를 위해 의열단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닮은 김지섭을 일본으로 보냅니다.


당연히 폭탄을 소지하고는 정상적인 루트로 일본에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상해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석탄운반선 '천성환호'를 통해 12월 21일, 일본으로 밀항하게 됩니다.


열흘 후인 12월 31일, 천성환호는 일본 후쿠오카 현 야와타제철소에 도착하고, 열흘간이나 배 밑 창고에서 지내며 하루에 주먹밥 한두 개로 끼니를 때우는 바람에 쇠약해진데다가, 자금마저 녹록치 않아 야와타 시(市) 여관에서 1월 3일까지 머무르다가 도쿄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도쿄에 출발하자마자 알게 된 사실은, 제국회의가 무기한 휴회되었다는 것. 밀항인 신분인데다가 폭탄을 소지하고 다니면 발각될 위험이 크고, 제국회의가 언제 다시 열리는지 일정이 전혀 없었기에, 김지섭 의사는 목표를 고쿄(일왕의 궁성)로 바꾸게 됩니다.


다음날인 1월 5일 오후 거사를 계획하고 폭탄 3개를 품 속에 숨긴 채 덴노가 사는 궁성 앞으로 가서 니주바시(이중교) 건너편 정문 앞까지 가서 보초병들과 싸우고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탄이 2개씩이나 나와 결국 체포가 됩니다.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때 밀항하느라 배 밑 창고에서 숨어 있었는데 배 아래쪽이라 습한 창고에서 열흘이나 있게 되는 바람에 폭탄이 습기를 먹게 되었고, 이 때문에 불발탄이 났다고 합니다.)


결국 김지섭은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거의 다 된 1927년 10월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28년 2월 20일에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형을당합니다.


엄청난 일을 해낸 독립운동가이지만 이름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유는 저 김지섭 의사의 의거건을 일본 정부에서 묻었기 때문. 이 사건은 일본 고위층 몇 사람이 죽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라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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