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사 크리스티 여사(Dame Agatha Christie, DBE, 1890년 9월 15일~1976년 1월 12일)는 영국의 추리 소설 작가이다. 메리 웨스트매컷(Mary Westmacott)이란 필명으로 연애 소설을 집필하기도 하였으나, 80여 편의 추리 소설의 애거사 크리스티란 필명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녀가 창조해 낸 에르퀼 푸아로와 제인 마플은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그녀는 추리 소설 장르에서 주목받는 작가로서 '추리 소설의 여왕'이라 불린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1890년 영국 데번 주 토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레드릭 밀러는 부유한 미국인이었으며 어머니 클라라 보머는 영국 귀족이었다. 그녀는 11세 연상의 언니와 10세 연상의 오빠가 있었으며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하였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집에서 교육받았고 16세 때 노래와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녀는 1914년 영국 항공대의 대령이었던 아치벌드 크리스티와 첫 결혼을 하였으나 결혼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서 1919년 크리스티의 외동딸인 로절린드 힉스가 태어났다.


그녀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병원의 약국에서 일했으며, 그녀의 소설에 시안화물, 라이신, 탈륨 등의 독극물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시기의 경험 때문이다.


버크셔 주 서닝데일에 살던 1926년 12월 8일, 그녀는 10일째 행방 불명이었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차는 서리 주 뉴렌즈 코너의 백악갱[2]에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해러게이트의 호텔에서 발견되었으며 그즈음 남편이 업무상 만나던 여자의 이름으로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아가사 크리스티는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과 남편의 의처증 때문에 신경쇠약과 배회증이 발병하여 고통받고 있었다.


1930년 애거사 크리스티는 14세 연하였던 고고학자인 맥스 맬로원과 재혼하였다. 두 번째 결혼은 평탄하였으며 남편과 함께 중동을 여행한 경험이 소설에 반영되었다.


1971년 대영 제국 훈장 2등급(DBE, 작위급 훈장)을 받았으며 1976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외동딸 로절린드 힉스 역시 2004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현재 그녀의 손자인 매튜 프리처드가 그녀의 저작권을 행사하고 있다. 크리스티의 소설들의 한국어판은 줄곧 번역되어 왔으나, 정식 한국어판은 황금가지의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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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호 침몰 사고(昌景號浸沒事故)는 1953년 1월 9일 전남 여수항에서 부산항으로 가던 정기 여객선 창경호가 경상남도 부산시 서남쪽 다대포 앞바다 거북섬 부근에서 강풍을 만나 침몰한 사고이다. 승선인원 중 선장과 선원 3명 학생 2명 군인 2명을 제외하고 300여 명이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1월 9일 오후 2시에 전남 여수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가던 대동상선 소속의 150톤급 정기 여객선 창경호가 오후 10시 40분경 부산 서남쪽 8km쯤 지점에 위치한 다대포 앞바다 거북섬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에서 왼쪽으로 급격하게 기울면서 20 ~ 30분 만에 침몰하였다. 당시 창경호는 승객 2백 수십 명과 쌀 450가마를 싣고 있었으나, 선장과 선원 3명, 승객 3명만이 구조되었다고 보도되었다. 며칠 후, 또 한 명의 생존자가 있음이 알려져 생존자는 8명으로 늘어났다.


1953년 1월 9일 오후 2시에 전남 여수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가던 대동상선 소속의 150톤급 정기 여객선 창경호가 오후 10시 40분경 부산 서남쪽 8km쯤 지점에 위치한 다대포 앞바다 거북섬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에서 왼쪽으로 급격하게 기울면서 20 ~ 30분 만에 침몰하였다. 당시 창경호는 승객 2백 수십 명과 쌀 450가마를 싣고 있었으나, 선장과 선원 3명, 승객 3명만이 구조되었다고 보도되었다. 며칠 후, 또 한 명의 생존자가 있음이 알려져 생존자는 8명으로 늘어났다.


창경호의 제원

길이 33.6m, 폭 6.15m, 총 147 톤이며, 승선 정원은 240명, 화물 적재량 100 톤이었고, 선령은 20년이었다.


창경호를 쫓아가다가 사고를 목격한 장구호의 보고로 조난 사실이 알려졌으며, 어둠 속에서 주변의 선박을 동원한 수색에서는 침몰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다음날인 10일 12시경 현장을 발견하여 시신 5구를 인양하였다. 침몰된 선체는 1월 11일에 발견되었고, 유족들은 배의 인양을 서두를 것을 요구하였다.


13일에는 풍랑과 어둠, 시신 대부분의 표류, 잠수부들의 임금 전달의 문제로 시신 인양 작업이 부진했다고 보도되었다. 센 조수도 인양 작업을 지연시켰다. 시신의 인양은 1월 24일부로 266구를 인양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승선한 승객의 수는 승객 명부에 181명이 기록되어 있었고, 선장의 증언에 따라 실제로는 230명 정도 될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인양 작업이 진행되면서 300명에 가까왔음이 드러났다. 1월 24일까지 모두 266주의 시신이 인양되었고, 40여 구의 시신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선체 인양은 3월 8일에 착수되었고 3월 15일 완료를 목표로 한다고 보도되었으나, 실제로는 1955년 12월 6일에 인양이 완료되었다. 1956년 6월 1일에는 재취항을 목적으로 수리 중이던 선체의 내부에서 해골이 된 시신 3구가 발견되었다.


1953년 1월 12일에는 국회에 창경호 침몰 사고가 안건으로 긴급 상정되었으며, 13일 진상조사위원회가 결의되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대형 인명사고시 운수업자와 업무를 소홀히 한 감독기관에 대한 벌금을 이전의 250배로 올리고 3년 이하의 금고였던 형량을 최고 사형까지 내릴 수 있게 하는 〈업무상과실사상죄의 특별처벌법〉의 초안이 법무부서에서 작성되기도 하였다.


창경호 침몰 사고로 모두 13명이 기소되었으며, 1953년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검사가 주장한 고의살인죄가 아닌 업무상과실치사가 적용되어 선장은 금고 3년, 대동상선 사장은 금고 2년, 선원들은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창경호의 선장을 포함한 생존자들은 높은 파도나 횡파에 의해 침몰되었다고 진술하였고, 긴급구호본부에서는 초과 적재를 침몰의 원인으로 추측하였다. 창경호는 당시 2백 톤을 초과한 승객과 화물을 싣고 있었고, 거기에 거센 파도를 만나 침몰했다는 것이다. 1월 14일 보도된 검찰당국의 조사에서는 쌀 260가마를 선저에, 200가마를 상갑판에 실어 균형이 맞지 않은 것을 주요 원인으로 추정하였다.


창경호의 선체는 20년이상 된 낡은 화물용 범선을 여객선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1945년 7월에 미군 폭격기에 의해 손상을 입고 침몰한 관부연락선 텐잔마루 호(천산환, 일본어: 天山丸)를 수리해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창경호는 또한 구명보트 한 척 및 구명복 70벌을 모두 본사 창고에 두고 다닌 것이 국회 특별조사단의 조사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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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金光石, 1964년 1월 22일 ~ 1996년 1월 6일)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여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가요를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에 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하였으며, 노찾사 1집에도 참여하였다.이후 동물원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일반 대중에까지 알렸으며, 동물원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통기타 가수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6년 1월 6일 자살로 인해 사망하였다. 대표곡으로는 〈사랑했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곳〉, 〈서른 즈음에〉, 〈그날들〉, 〈이등병의 편지〉,〈먼지가 되어〉 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김광석을 '노래하는 철학자'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노래는 우리 인생의 길목마다 늘 함께하고 있으며, 그의 노래를 통해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기도 한다.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2008년 1월 6일에는 12주기 추모 콘서트와 함께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노래비는 대학로의 학전 블루 소극장에 세워졌으며 조각가 안규철이 제작했다.


또한 2010년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거리'(행정명:김광석다시그리기길)가 조성되어 350미터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다양한 벽화와 작품들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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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金祉燮, 1885년 ~ 1928년 2월 2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호는 추강(秋岡)이며,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입니다.



일본어를 1달 만에 익혀 상주보통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독학으로 금산 지방 법원의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모든 것을 뿌리친 채 오로지 독립운동만을 할 것을 결심,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과 고려공산당에 가입합니다.


천황을 향해 의거하기로 한 이유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을 일본인들이 사냥하고 학살하는 모습에서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그 상황에서 충격을 받고, 목숨 바쳐 의거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의열단에 가입한 후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 내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찰서, 재판소 등을 비롯한 일제 주요관서를 폭파하기 위해 국내로 30여 개나 되는 폭탄의 반입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간신히 빠져나와 다시 상하이로 피신합니다.


이후 의열단에서는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고관들이 대거 참석하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했고, 이를 위해 의열단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닮은 김지섭을 일본으로 보냅니다.


당연히 폭탄을 소지하고는 정상적인 루트로 일본에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상해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석탄운반선 '천성환호'를 통해 12월 21일, 일본으로 밀항하게 됩니다.


열흘 후인 12월 31일, 천성환호는 일본 후쿠오카 현 야와타제철소에 도착하고, 열흘간이나 배 밑 창고에서 지내며 하루에 주먹밥 한두 개로 끼니를 때우는 바람에 쇠약해진데다가, 자금마저 녹록치 않아 야와타 시(市) 여관에서 1월 3일까지 머무르다가 도쿄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도쿄에 출발하자마자 알게 된 사실은, 제국회의가 무기한 휴회되었다는 것. 밀항인 신분인데다가 폭탄을 소지하고 다니면 발각될 위험이 크고, 제국회의가 언제 다시 열리는지 일정이 전혀 없었기에, 김지섭 의사는 목표를 고쿄(일왕의 궁성)로 바꾸게 됩니다.


다음날인 1월 5일 오후 거사를 계획하고 폭탄 3개를 품 속에 숨긴 채 덴노가 사는 궁성 앞으로 가서 니주바시(이중교) 건너편 정문 앞까지 가서 보초병들과 싸우고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탄이 2개씩이나 나와 결국 체포가 됩니다.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때 밀항하느라 배 밑 창고에서 숨어 있었는데 배 아래쪽이라 습한 창고에서 열흘이나 있게 되는 바람에 폭탄이 습기를 먹게 되었고, 이 때문에 불발탄이 났다고 합니다.)


결국 김지섭은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거의 다 된 1927년 10월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28년 2월 20일에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형을당합니다.


엄청난 일을 해낸 독립운동가이지만 이름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유는 저 김지섭 의사의 의거건을 일본 정부에서 묻었기 때문. 이 사건은 일본 고위층 몇 사람이 죽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라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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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경(영어: Sir Isaac Newton,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1727년 3월 20일)은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수학자이다. 학계와 대중 양측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 1명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은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양력(陽曆)으로,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여 이 역법을 시행했기 때문에 그레고리력이라고 부릅니다.


율리우스력은 고대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제정해 기원전 45년부터 시행한 양력(陽曆) 역법입니다. 율리우스력의 1년은 365일 또는 366일(4년에 한번)입니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rincipia")는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히며,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합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습니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 광선으로 분해시키는 스펙트럼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빛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키며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뉴턴의 냉각 법칙을 발명하고 음속에 대해서 연구하고, 뉴턴 유체의 개념을 고안합니다.


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의 발달에 대한 성과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는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f인 f(x)=0을 푸는 방법을 발명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합니다.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이 되었습니다.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고, 그는 그를 오늘 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 자연과학보다도 성서 해석이나 오컬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H. 하트(Michael H. Hart)가 저술한 "The 100"에서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였고 유일신인 창조주를 믿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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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 1969년 1월 3일 ~ )는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이다.


포뮬러 원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을 경신하고,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하였다.



1984년, 15세의 나이로 독일 카트 주니어 대회에서의 우승을 시작으로 포뮬러 원 대회에서 베네통 포뮬러 소속으로 1994년과 1995년 연속 우승, 1996년 스쿠데리아 페라리로 팀을 옮긴 후 2000년 ~ 200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였고, 2006년을 끝으로 F1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 취미삼아 독일 국내 모터사이클 레이스인 IDM Superbike 시리즈에 출전하고 있었지만, 2009년 스쿠데리아 페라리 소속 펠리프 마사가 헝가리GP 에서 중상을 입자 잠시 복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슈마허 역시 2009년 초에 모터사이클 사고로 입은 목 부상으로 계획을 취소하게 되었다. 

이후 2010년 브론 GP를 인수하여 창단된 메르세데스 GP에 현역으로 복귀하였으며, 2012년 10월 4일

일본 그랑프리 기자회견을 통해 두 번째 은퇴를 선언, 13위로 마감하며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은퇴한 뒤 가족들과 스위스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2013년 12월 30일 (현지시각 29일 밤) 프랑스쪽 알프스에서 가족들과 스키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헬멧을 쓴 채로 바위에 부딪혔는데, 사고 직후에는 의식이 있었고 헬리콥터로 인근 병원에 옮겨졌으나 그런대로 멀쩡한 줄 알았는데 결국 중태에 빠져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검사 결과 두개골 외상으로 인한 뇌출혈이 있어 바로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수개월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현재는 스키사고로 인한 뇌진탕으로 수술 후 회복중에 있으며 상태는 많이 호전되어 지금은 대중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재활치료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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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최초의 달 탐사선 루나 1호 발사.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고 나서 이미 달 탐사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58년 이후에는 달에 착륙시킨 후 조사를 진행할 루나 계획을 실시하였으며, 

맨 처음 3번은 실패하였으나, 4번째 발사 시도였던 1959년 1월 2일에 발사를 성공시켰다. 

루나 1호는 소련의 달 탐사선으로, 세계 최초로 달 착륙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달 착륙을 시도하다가 달 근방 5,995 km 까지 접근을 하지만 달에 착륙은 

하지 못하고, 달에 근접하는데 그쳤다.

현재 루나 1호는 궤도를 바꾸어 지구와 화성 사이의 궤도를 돌고 있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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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 대통령 사담 후세인 사형 집행


사담 후세인(아랍어: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사담 후사인 압둘 마지드 앗 티크리티, 1937년 4월 28일 ~ 2006년 12월 30일, 문화어: 싸담 후쎄인)은 이라크의 당원, 정치인이다.


이라크내 소수종파인 수니파 출신으로, 세속적 범아랍주의와 아랍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바트당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바트당의 장기 집권을 가져온 1968년 군사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77년부터는 이라크의 부통령이었고, 1979년 7월 16일부터 2003년 4월 9일까지 이라크를 통치한 대통령이었다.


집권 직후 바트당 내 반대파를 숙청, 처형하고 민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이라크 변방의 떠돌이 소수민족인 쿠르드 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을 기획한다.





후세인(حسین)이란 이름 자체는 ‘멋진, 아름다운’의 의미를 지니는데, 시아파의 성자인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려 후세인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 

아랍인뿐만 아니라 무슬림이라면 많이 사용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 1441호를 근거로서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후 사담 후세인은 은신처에 3년 이상 옮겨다니며 은신하였으나 영화 레드 던에서 이름을 따온 미군의 레드 던 작전으로 인해 다우르에서 체포되어 전범 재판을 받았다.


2006년 11월 5일 1심 재판에서 시아파 무슬림 학살에 대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사담은 "나는 사형당하는 것이 절대 두렵지 않다. 이란과 손잡으면 안되며, 경계해야 한다." 고 말하였다. 이후 항소했으나 이라크 최고 항소법원은 사형을 확정하여 2006년 12월 30일 수도 바그다드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그의 처형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기도 했다. 

그의 처형으로 인해 저항세력 계파 중 하나인 후세인 지지파들의 반발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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