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디드 니 학살


운디드니 학살 (Wounded Knee Massacre) 또는 미국은 공식적으로 운디드 니 전투(Battle of Wounded Knee)라고 한다.



1890년 12월 29일, 운디드 니 크릭 근처의 라코타 족 파인 릿지 인디언 보호구역(Pine Ridge Indian Reservation)에서 미군에 의해 운디드니 언덕에서 벌어진 인디언 대학살 사건이다.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던 제7기병대 500여명은 수족을 무장해제하던 중 1명의 수족 용사가 칼을 놓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격을 가해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 200명 이상의 수족을 죽이는 대량 학살을 감행했다.

 

이 사건은 미군과 인디언 사이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으며,

현제 학살이 벌어진 지역은 현재 국립역사지표구로 지정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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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 세계 최초의 유료 영화 상영


영화를 대중화한 뤼미에르 형제.




뤼미에르 형제는 프랑스의 발명가 형제 오귀스트 마리 루이 니콜라 뤼미에르(프랑스어: Auguste Marie Louis Nicholas Lumière, 1862년 10월 19일 - 1954년 4월 10일)와 루이 장 뤼미에르(프랑스어: Louis Jean Lumière, 1864년 10월 5일 - 1948년 6월 6일)를 가리킨다. 

기계 제작자인 동시에 제작・흥행・배급 등 현재의 영화제작 보급형태의 선구적 역할을 한 영화의 시조이며,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하여 이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영화를 찍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Sortie des Usines Lumière à Lyon)» ,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 등이 있다.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영화사인 고몽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이때 상영된 세계 최초의 영화는 《열차의 도착》 이라는 50초의 짧은 내용의 작품이였다. 

이 영화는 아무런 스토리도 없이 단순히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만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지만 19세기 후반의 사람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이를 본 카페의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고, 스크린에서 열차가 올 때, 진짜로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으악'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고 한다.





최초의 대중영화로 평가되고 있는 「기차의 도착」(1895)의 한 장면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영화는 다음해인 1896년에 베를린, 런던 등 유럽 주요 도시에 상영되었다고한다.


지금 우리 일상과 함께하는 영화가 저렇게 시작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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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최수봉 [1894~1921]


1894년 경남 밀양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향리의 개량서당을 다니면서 한문과 유교적 가르침을 익히고 신지식도 섭렵하였다. 그 후 김원봉과 함께 밀양공보를 다니던 중 단군이 일본 대화족(大和族) 시조의 아우라고 주장한 일본인 교사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였다.


1910년 사립 동화(同和)학교에 편입하여 김대지 등 독립운동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키워갔다. 1912년 범어사가 운영하는 부산 명정학교와 1913년 기독교 계통의 평양 숭실학교를 다녔다.


1916년 평안도에서 광부와 우편배달부 생활을 한 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인 봉천(오늘날 선양)과 안동(오늘날 단둥)을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1920년 의열단이 제1차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거사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밀반입하다 일제 경찰에 적발되어 여러 단원들이 체포되자 선생은 이종암 등과 식민통치의 폭압기구에 폭탄 투척 거사를 계획하였다. 1920년 12월 27일 월요일 아침 경찰서장이 연말연시 특별경계를 당부하는 훈시를 하던 틈을 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선생에 대한 재판은 상고심까지 진행되었으나 일제는 의거의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재판을 속전속결로 진행하였고, 확정판결 한 달 보름 만에 대구감옥에서 사형을 집행하였다. 선생의 의거는 항일 민심과 독립운동 진영을 고무시켜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투탄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선생의 드높은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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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싱데이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을 가리키는 말로, 과거 영국과 영연방 국가에서는 이날을 휴일로 삼고 하인들에게 선물을 했다.



오늘날에는 파격적 할인가로 제품을 판매하는 크리스마스 전후의 쇼핑 시즌을 지칭한다.





박싱데이의 기원에 관한 설



★ 수백년 전에 상인들이 하인들에게 음식과 과일을 크리스마스 팁으로 주었다. 자연스럽게 음식과      과일 선물을 상자에 포장되었기 때문에 "박싱 데이"라고 불린다.


★ 봉건 시대에 크리스마스는 대가족이 모이는 날이었다. 모든 농노들은 영주의 집으로 모였고, 영주      가 농노들에게 연금을 주었다. 12월 25일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면 영주가 자기 땅에 살고 있는    농노들에게 옷, 곡물, 연장과 같은 물건들을 상자에 담아 주었고, 각 농노의 식구들은 크리스마스 다    음날 그 상자를 집으로 가져갔다. 이 설명에 따르면 이 행사에는 자의성이 전혀 없었고, 영주는 이런    물품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물건을 상자에 담아 주었기 때문에 그 날을 박싱 데이라고 불렀다.


★ 수십년 전만 해도 영국에서는 하인들이 크리스마스 다음 날(12월 26일)에 일을 하러 올 때 고용주      에게 상자를 갖고 오는 풍습이 있었다. 고용주들은 특별 연말 수당으로 상자에 동전을 넣어줬다. 이    는 근대의 크리스마스 보너스와 비교할 수 있다. 하인들은 동전 상자를 들고 갔으며, 그래서 박싱 데    이라 부른다.


★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에 헌금함을 열어서 그 돈을 다음 날 가난하고 비천한 주민들에게 주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 설명에 따르면 "박스(box)" 또는 "박싱 데이"는 헌금이 남아있는 거대한 잠금 상자      하나에서 유래했다.


★ 영국에서는 많은 하인들이 크리스마스에 고용주를 위해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고용주들이 25일    파티 후 남은 음식들을 상자에 담아 하인들에 가져 가도록 했다. 즉, 맛있는 음식이 담긴 상자를 받    아 오는 날이라는 뜻에서 박싱 데이라로 불리게 되었다.



현대의 박싱데이는?


★ 크리스마스를 맞아 소매상들이 특별 할인 판매를 단행하는 쇼핑 시즌을 박싱데이라고 한다. 캐나다    에서는 박싱데이 기간 중 이른 새벽부터 특가품을 사려는 소비자들이 상점, 특히 대형가전제품 소매    점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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