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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열심히 노력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 토마스 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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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호 침몰 사고(昌景號浸沒事故)는 1953년 1월 9일 전남 여수항에서 부산항으로 가던 정기 여객선 창경호가 경상남도 부산시 서남쪽 다대포 앞바다 거북섬 부근에서 강풍을 만나 침몰한 사고이다. 승선인원 중 선장과 선원 3명 학생 2명 군인 2명을 제외하고 300여 명이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1월 9일 오후 2시에 전남 여수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가던 대동상선 소속의 150톤급 정기 여객선 창경호가 오후 10시 40분경 부산 서남쪽 8km쯤 지점에 위치한 다대포 앞바다 거북섬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에서 왼쪽으로 급격하게 기울면서 20 ~ 30분 만에 침몰하였다. 당시 창경호는 승객 2백 수십 명과 쌀 450가마를 싣고 있었으나, 선장과 선원 3명, 승객 3명만이 구조되었다고 보도되었다. 며칠 후, 또 한 명의 생존자가 있음이 알려져 생존자는 8명으로 늘어났다.


1953년 1월 9일 오후 2시에 전남 여수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가던 대동상선 소속의 150톤급 정기 여객선 창경호가 오후 10시 40분경 부산 서남쪽 8km쯤 지점에 위치한 다대포 앞바다 거북섬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에서 왼쪽으로 급격하게 기울면서 20 ~ 30분 만에 침몰하였다. 당시 창경호는 승객 2백 수십 명과 쌀 450가마를 싣고 있었으나, 선장과 선원 3명, 승객 3명만이 구조되었다고 보도되었다. 며칠 후, 또 한 명의 생존자가 있음이 알려져 생존자는 8명으로 늘어났다.


창경호의 제원

길이 33.6m, 폭 6.15m, 총 147 톤이며, 승선 정원은 240명, 화물 적재량 100 톤이었고, 선령은 20년이었다.


창경호를 쫓아가다가 사고를 목격한 장구호의 보고로 조난 사실이 알려졌으며, 어둠 속에서 주변의 선박을 동원한 수색에서는 침몰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다음날인 10일 12시경 현장을 발견하여 시신 5구를 인양하였다. 침몰된 선체는 1월 11일에 발견되었고, 유족들은 배의 인양을 서두를 것을 요구하였다.


13일에는 풍랑과 어둠, 시신 대부분의 표류, 잠수부들의 임금 전달의 문제로 시신 인양 작업이 부진했다고 보도되었다. 센 조수도 인양 작업을 지연시켰다. 시신의 인양은 1월 24일부로 266구를 인양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승선한 승객의 수는 승객 명부에 181명이 기록되어 있었고, 선장의 증언에 따라 실제로는 230명 정도 될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인양 작업이 진행되면서 300명에 가까왔음이 드러났다. 1월 24일까지 모두 266주의 시신이 인양되었고, 40여 구의 시신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선체 인양은 3월 8일에 착수되었고 3월 15일 완료를 목표로 한다고 보도되었으나, 실제로는 1955년 12월 6일에 인양이 완료되었다. 1956년 6월 1일에는 재취항을 목적으로 수리 중이던 선체의 내부에서 해골이 된 시신 3구가 발견되었다.


1953년 1월 12일에는 국회에 창경호 침몰 사고가 안건으로 긴급 상정되었으며, 13일 진상조사위원회가 결의되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대형 인명사고시 운수업자와 업무를 소홀히 한 감독기관에 대한 벌금을 이전의 250배로 올리고 3년 이하의 금고였던 형량을 최고 사형까지 내릴 수 있게 하는 〈업무상과실사상죄의 특별처벌법〉의 초안이 법무부서에서 작성되기도 하였다.


창경호 침몰 사고로 모두 13명이 기소되었으며, 1953년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검사가 주장한 고의살인죄가 아닌 업무상과실치사가 적용되어 선장은 금고 3년, 대동상선 사장은 금고 2년, 선원들은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창경호의 선장을 포함한 생존자들은 높은 파도나 횡파에 의해 침몰되었다고 진술하였고, 긴급구호본부에서는 초과 적재를 침몰의 원인으로 추측하였다. 창경호는 당시 2백 톤을 초과한 승객과 화물을 싣고 있었고, 거기에 거센 파도를 만나 침몰했다는 것이다. 1월 14일 보도된 검찰당국의 조사에서는 쌀 260가마를 선저에, 200가마를 상갑판에 실어 균형이 맞지 않은 것을 주요 원인으로 추정하였다.


창경호의 선체는 20년이상 된 낡은 화물용 범선을 여객선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1945년 7월에 미군 폭격기에 의해 손상을 입고 침몰한 관부연락선 텐잔마루 호(천산환, 일본어: 天山丸)를 수리해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창경호는 또한 구명보트 한 척 및 구명복 70벌을 모두 본사 창고에 두고 다닌 것이 국회 특별조사단의 조사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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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 장 자크 루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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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金光石, 1964년 1월 22일 ~ 1996년 1월 6일)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여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가요를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에 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하였으며, 노찾사 1집에도 참여하였다.이후 동물원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일반 대중에까지 알렸으며, 동물원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통기타 가수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6년 1월 6일 자살로 인해 사망하였다. 대표곡으로는 〈사랑했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곳〉, 〈서른 즈음에〉, 〈그날들〉, 〈이등병의 편지〉,〈먼지가 되어〉 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김광석을 '노래하는 철학자'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노래는 우리 인생의 길목마다 늘 함께하고 있으며, 그의 노래를 통해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기도 한다.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2008년 1월 6일에는 12주기 추모 콘서트와 함께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노래비는 대학로의 학전 블루 소극장에 세워졌으며 조각가 안규철이 제작했다.


또한 2010년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거리'(행정명:김광석다시그리기길)가 조성되어 350미터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다양한 벽화와 작품들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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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행운이라 부른다.
패배는 미리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불운이라 부른다.


– 로알 아문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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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金祉燮, 1885년 ~ 1928년 2월 2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호는 추강(秋岡)이며,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입니다.



일본어를 1달 만에 익혀 상주보통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독학으로 금산 지방 법원의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모든 것을 뿌리친 채 오로지 독립운동만을 할 것을 결심,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과 고려공산당에 가입합니다.


천황을 향해 의거하기로 한 이유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을 일본인들이 사냥하고 학살하는 모습에서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그 상황에서 충격을 받고, 목숨 바쳐 의거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의열단에 가입한 후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 내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찰서, 재판소 등을 비롯한 일제 주요관서를 폭파하기 위해 국내로 30여 개나 되는 폭탄의 반입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간신히 빠져나와 다시 상하이로 피신합니다.


이후 의열단에서는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고관들이 대거 참석하는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했고, 이를 위해 의열단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닮은 김지섭을 일본으로 보냅니다.


당연히 폭탄을 소지하고는 정상적인 루트로 일본에 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상해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석탄운반선 '천성환호'를 통해 12월 21일, 일본으로 밀항하게 됩니다.


열흘 후인 12월 31일, 천성환호는 일본 후쿠오카 현 야와타제철소에 도착하고, 열흘간이나 배 밑 창고에서 지내며 하루에 주먹밥 한두 개로 끼니를 때우는 바람에 쇠약해진데다가, 자금마저 녹록치 않아 야와타 시(市) 여관에서 1월 3일까지 머무르다가 도쿄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도쿄에 출발하자마자 알게 된 사실은, 제국회의가 무기한 휴회되었다는 것. 밀항인 신분인데다가 폭탄을 소지하고 다니면 발각될 위험이 크고, 제국회의가 언제 다시 열리는지 일정이 전혀 없었기에, 김지섭 의사는 목표를 고쿄(일왕의 궁성)로 바꾸게 됩니다.


다음날인 1월 5일 오후 거사를 계획하고 폭탄 3개를 품 속에 숨긴 채 덴노가 사는 궁성 앞으로 가서 니주바시(이중교) 건너편 정문 앞까지 가서 보초병들과 싸우고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탄이 2개씩이나 나와 결국 체포가 됩니다.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때 밀항하느라 배 밑 창고에서 숨어 있었는데 배 아래쪽이라 습한 창고에서 열흘이나 있게 되는 바람에 폭탄이 습기를 먹게 되었고, 이 때문에 불발탄이 났다고 합니다.)


결국 김지섭은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거의 다 된 1927년 10월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28년 2월 20일에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형을당합니다.


엄청난 일을 해낸 독립운동가이지만 이름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유는 저 김지섭 의사의 의거건을 일본 정부에서 묻었기 때문. 이 사건은 일본 고위층 몇 사람이 죽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라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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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 행운보다는,

날마다 일어나는 소소한 편안함과 기쁨에서
행복은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 벤자민 프랭클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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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사냥꾼

움짤 2017. 1. 4. 09:35

분명히 저기 있는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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